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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특별기획] 1.이산의 아픔 … “눈 감을 때까지 그리움 계속될 것”


함흥 출신인 전선복 할머니는 1950년 12월 흥남 철수작전 때 부모님, 그리고 두 언니 가족과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랐던 이산가족이다.
함흥 출신인 전선복 할머니는 1950년 12월 흥남 철수작전 때 부모님, 그리고 두 언니 가족과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랐던 이산가족이다.

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70년이 넘었지만 이산가족들의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대면 상봉과 화상 상봉을 했지만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은 기회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VOA는 한인 이산가족들의 아픔과 상봉 노력을 주도하는 선구자들, 미국 의회의 관련 입법 활동과 도전 과제 등을 조명하는 특별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첫 순서로 김영권 기자가 긴 이별 속에서도 상봉의 희망을 놓지 못하고 인한 1세대 한인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녹취: ‘고향의 봄’ 키보드 음악]

미국 북버지니아의 한 시니어센터. 올해 87살의 전선복 할머니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중장년들에게 키보드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함흥 출신인 전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출한 흥남 철수작전 때 부모님, 그리고 두 언니 가족과 함께 필사적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랐던 이산가족입니다.

전 할머니는 그 때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합니다.

[녹취: 전선복 씨] “전 다 기억나죠. 어제 일 같이 기억이 나죠. 언니네 조카들 제일 어린 돌이 안 된 아기를 내가 업고 타는데 올라갈 수가 없어요. 뒤에 아기가 있고 누가 끌어주는 사람도 없고 밀어주는 사람도 없고 막 아무튼 여기서 죽는구나 했죠.”

천신만고 끝에 사흘 만에 거제도에 도착했지만 5남매 중 결혼해 평양에 살던 큰 언니와 인민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입대한 네 살 위 오빠는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녹취: 전선복 씨] “그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죠. 오빠가 외아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어머니는 매일 부둣가에 나가서 매일 피난민이 쏟아져 오니까 혹시 거기 아들이 거기 섞여 있나? 그냥 아들만 생각하고.”

하지만 그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은 오빠와 큰언니를 그리워하다 먼저 눈을 감았습니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작전 때 부모님, 그리고 두 언니 가족과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랐던 이산가족인 전선복 할머니가 VOA 김영권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1950년 12월 흥남 철수작전 때 부모님, 그리고 두 언니 가족과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랐던 이산가족인 전선복 할머니가 VOA 김영권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1976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전 할머니는 여러 해가 지난 뒤 오빠와 언니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우연히 생겼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 지인을 통해 캐나다의 한 한인 단체를 소개받은 겁니다.

전 할머니는 북한의 가족을 찾을 수 있으니 착수금을 보내라는 이 단체의 말을 듣고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돈을 보냈습니다.

[녹취: 전선복 씨] “그때만 해도 언니가 살아계실 것 같고 오빠도 살아계실 것 같고. 얼마를 보내라. 그래서 보냈어요. 보내고 금방 그게 끊어졌어요.”

캐나다의 한인 단체는 그냥 기다리라는 말만 계속하다 결국 연락을 끊었습니다. 큰 상심에 잠긴 전 할머니는 끝내 중개인을 통한 가족 찾기를 포기했습니다.

[녹취: 전선복 씨] “안타깝죠. 안타깝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마음으로는 안타깝지만 할 수 없는 일이고. 아무튼 뭐 저부터도 그렇고 제 주변에 있는 그런 분들 이제는 거의 체념하는 것 같아요.”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은 지난 2001년 기준 최대 10만 명으로 추산됐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고령이었던 이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규모가 대폭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남북한은 지금까지 이산가족과 관련해 21차례 대면 상봉, 7차례 화상 상봉을 했지만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은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한국 통일부에 따르면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 거주 한인도 그동안 120명이 대면 상봉을 했지만 모두 북측 가족의 요청으로 이뤄졌을 뿐 한인 이산가족의 요청으로 상봉한 경우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이 때문에 북미 이산가족 중 일부는 정부가 아닌 캐나다와 미국의 친북 단체나 관계자를 통해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개인적으로 북한의 가족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거나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나 투명하지 않은 과정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이 빚어졌고 북한의 가족에게 부담을 주는 상황도 종종 발생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폴스처치에 사는 평안북도 태천 출신의 89살 이승엽 할아버지가 VOA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 폴스처치에 사는 평안북도 태천 출신의 89살 이승엽 할아버지가 VOA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의 폴스처치에 사는 평안북도 태천 출신의 89살 이승엽 할아버지도 캐나다의 한 민간 단체를 통해 북한을 두 번 방문했습니다.

평양에서 유학 중 1·4 후퇴 때 가족과 헤어졌던 15살 소년 이승엽은 1982년 우여곡절 끝에 47살의 중년이 되어 북한을 방문해 어머니와 극적으로 상봉했습니다.

[녹취: 이승엽 씨] “그냥 뭐 목석이죠. 목석! 그냥 뭐 물론 인간이니까 이제 뭐 말도 표현을 할 수가 없지만 뭐 아무 말도 없고 그냥 모든 표정도 굳어있고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거죠. 저 역시도 마찬가지고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32년 만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꿈인지 현실인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만의 고향 방문은 가족을 이용한 북한 당국자들과 중개인들의 집요한 금전 요구로 아름다운 결말을 맺지 못했습니다.

[녹취: 이승엽 씨] “어머니를 만나 뵌 거는 뭐 정말 더 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내가 내 동생한테는 잘못한 거구나. 내가 감으로써 내 동생한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어준 거예요. 그걸 전부 내 동생이 책임지고 보상을 해야 되는 그런 형편이 된 거예요. 알고 보니까. 저를 포섭을 잘 했어야 되는데 포섭을 못 하니까 결국 그동안에 들어간 비용은 전부 내 동생이 책임지고,”

미국 버지니아주 폴스처치에 사는 평안북도 태천 출신의 89살 이승엽 할아버지.
미국 버지니아주 폴스처치에 사는 평안북도 태천 출신의 89살 이승엽 할아버지.

한국전쟁 휴전 직전 공군에 조기 입대해 이후 베트남전까지 참전하고 공군 상사로 제대한 뒤 1971년 미국에 정착한 이 할아버지는 공산당을 불신해 방북 후 계속된 북한 측의 금전 요구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방북 5년 뒤인 1987년 어머니가 병환으로 오래 살 수 없다는 편지를 받고 어쩔 수 없이 다시 방북한 할아버지에게 북한 관계자는 트럭을 기증해야 한다고 다시 압박했습니다.

[녹취: 이승엽 씨] “** 동무가 그동안에 여기 지역구에서 상당히 공도 많고 이랬는데 이번에 노동당 당원 추천을 받았는데 조금 미달이 돼가지고는 아쉽게도 떨어졌는데 형님이 도와줘야 합니다. 딱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벌써 딱 알았죠.”

미국에서 직장을 다니던 할아버지는 그러한 큰돈을 마련할 여력이 없었고, 이후 몇 년간 동생과 편지를 주고받다가 완전히 소식이 끊겼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북한 정권이 이산가족의 아픔을 외면한 채 가족을 인질로 삼아 돈놀이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녹취: 이승엽 씨] “그러니까 그걸 뭐 하나의 나라라고 볼 수 없는 거죠. 깡패집단이죠. 이건 일종의 어떻게 그걸 그 인질로 삼아서 그걸 돈으로”

북한 당국의 이러한 횡포를 피해 중국에서 자력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불러내 만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20일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단체상봉 행사에서 남측 이금섬(92) 할머니가 아들 리상철(71)을 부둥켜 안고 오열하고 있다.
20일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제21차 남북 이산가족 단체상봉 행사에서 남측 이금섬(92) 할머니가 아들 리상철(71)을 부둥켜 안고 오열하고 있다.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에 사는 올해 97살의 대동군 출신 진기찬 할아버지가 그런 경우입니다.

1·4 후퇴 피난길에 부모님, 두 동생과 헤어져 홀로 남쪽으로 왔다가 1973년 미국에 정착한 진 할아버지는 캐나다의 한 단체를 통해 1995년 어렵게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운 가족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녹취: 진기찬 씨] “3천 불 내라고 해. 그럼 고향에 보내주겠다고. 3천 불 안 줄려고 안 갔지.”

진 할아버지는 이미 1980년대부터 북한 당국자 등이 동생을 옆에 앉혀 놓고 미국으로 직접 전화해(수신자 부담) 계좌 번호를 불러주며 투자 유치를 제안하는 등 금전 요구를 많이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때문에 부담을 느껴 평양에서 받은 모든 요구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 97세 이산가족 진기찬 할아버지가 VOA 김영권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 97세 이산가족 진기찬 할아버지가 VOA 김영권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진 할아버지는 미국에 돌아온 뒤 자신이 직접 중개인을 접촉해 두 동생을 1997년 중국 연길로 불러 내 47년여 만에 상봉했습니다.

[녹취: 진기찬 씨] “뭔 말도 할 것도 없어. 감개무량하니까니 이 말 저 말도 아무것도 안 나와. 보고 한참 우는 거이지. 오래간만에 만나게 되면 말할 것도 없어. 말도 안 나와 고저 얼굴만 보고 좀 웃는 거이지 뭐 또 실컷 울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진 할아버지는 이후 북한 당국자가 아닌 중개인들을 통해 동생들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하지만 동생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연락이 모두 끊겼습니다.

미국 워싱턴의 연방 의사당.
미국 워싱턴의 연방 의사당.

미국 의회는 앞서 2001년 이후 여러 결의안과 법안 채택을 통해 미주 한인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추진했지만 별다는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산가족 문제를 인도주의 사안으로 보는 미국과 이를 정치적 압박과 양보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북한의 입장차가 컸기 때문입니다.

줄리 터너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는 VOA에 “이러한 상봉을 가능하게 하는 데 있어 또 다른 큰 장애물은 북한과 다시 대화 테이블로 돌아가 이 인도주의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소통의 채널을 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터너 특사] “The other big obstacle with making these reunifications possible is getting back to the table with the North Koreans and opening a channel of communication that would allow for us to find a way to address this humanitarian issue. I mean, family reunifications are humanitarian in nature and given the age of many of the impacted individuals. We really hope we can find a way forward before it's too late.”

줄리 터너 미 국무부 북한인권특사
줄리 터너 미 국무부 북한인권특사

터너 특사는 “이산가족 상봉은 본질적으로 인도주의적인 문제”라며 “영향을 받은 많은 분의 연세를 고려할 때 너무 늦기 전에 진전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의회에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북한에 있는 가족과의 상봉을 돕기 위한 ‘이산가족 국가등록 법안’이 다시 계류돼 있습니다.

하지만 이산가족들은 이에 대한 기대보다는 담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진기찬 할아버지는 이러한 노력이 모두 좋은 일이지만 이제 너무 늦은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나타냈습니다.

[녹취: 진기찬 씨] “너무 늦었어. 북한에 있는 친척들도 내 형제들도 다 죽고 지금 내가 내일모레 100살인데 오래 살아야 60년, 70년 살아. 오래 살아야. 벌써 그 손자가 다 지금 70대 넘었는데 다 죽고 없지. 이게 다 헛수고야. 벌써 했어야지.”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 97살 진기찬 할아버지가 VOA 김영권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 97살 진기찬 할아버지가 VOA 김영권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는 이렇게 기대를 접었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이산가족의 숙명이라고 1세대들은 말합니다.

이승엽 할아버지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좀 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합니다.

[녹취: 이승엽 씨] “우리 바이든 대통령께서 우리 이산가족이 당장은 못 만나더라도 앞으로도 잘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염원하는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셔서 협력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녹취: ‘고향의 봄’ 키보드 소리]

전선복 할머니도 상봉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안 한다”면서도 오빠에 대한 그리움은 눈을 감을 때까지 내려놓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전선복 씨] “말로는 이제는 아휴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 말은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그게 아니거든요. 끈을 놓을 수가 없는 거죠.”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아웃트로: VOA 북미 이산가족 특집 방송, 내일은 제 2편으로 미국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노력해 온 1세대 리더들의 분투와 성과 등을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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